14편 성곽 건축의 정점 수원화성: 실학과 서양 건축술이 집약된 치성과 옹성

 수원화성의 성곽길을 따라 장안문에서 화서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조선 시대의 다른 산성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국적이면서도 치밀한 성벽의 실루엣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고건축과 유적 답사를 시작했을 무렵 제게 성곽이란 그저 돌을 높게 쌓아 올린 단순한 장벽에 불과했습니다.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처럼 험준한 산세를 방패 삼아 자연 지형에 기댄 전통 산성에 익숙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평지와 구릉을 아우르는 수원화성의 성벽을 직접 손으로 짚어가며 모서리를 돌았을 때, 사각지대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정교하게 튀어나온 구조물들의 유기적인 배치에 깊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와 정조의 개혁 의지, 그리고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인 <기기도설>의 지혜가 녹아든 수원화성의 독창적인 방어 공학을 정리해 드립니다.


일반적인 평면 성벽의 가장 큰 약점은 성벽 바로 아래 바짝 붙은 적을 위에서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려면 몸을 앞으로 내밀어야 하므로 적의 저격에 노출되기 쉽고, 성벽 밑동은 자연스럽게 방어자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치명적인 사각지대가 됩니다.


조선의 장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벽 중간중간에 꿩(雉)이 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엿보는 형상을 본뜬 '치성'을 밖으로 돌출되게 쌓았습니다.


  1. 입체적인 교차 사격 성벽 본체에서 사각형 형태로 불쑥 튀어나온 치성 위에 서면, 성벽 밑으로 기어오르는 적의 측면과 등 뒤를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좌우 치성에서 쏘아대는 활과 화포가 십자형 교차 사격망을 형성하기 때문에, 적군은 성벽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함정에 발을 들이는 셈이 됩니다.


  1. 지형과 용도에 따른 변형 수원화성에는 단순한 석축 치성 외에도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대기할 수 있는 목조 누각을 얹은 '포루(鋪樓)', 대포를 쏠 수 있도록 내부를 검은 전돌로 채워 견고하게 만든 '포루(砲樓)'가 일정 간격으로 번갈아 배치되어 있어 방어와 반격의 효율을 극대화했습니다.


성곽에서 적의 공성망치나 불화살 공격이 가장 집중되는 취약점은 바로 성문입니다. 수원화성의 4대문 중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 앞에는 문을 둥글게 감싸 안은 또 하나의 외벽, 즉 '옹성'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 항아리 속으로 적을 몰아넣는 구조: 독(甕)처럼 둥글게 둘러쳤다고 해서 이름 붙은 옹성은 성문으로 직진하려는 적의 진입로를 강제로 90도 꺾이게 만듭니다. 적군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사방이 높은 성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됩니다.


  • 오성지(五星池)의 소화 과학: 장안문 옹성 위쪽을 올려다보면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거대한 물탱크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적이 성문에 불을 지르려 할 때 이 구멍을 통해 대량의 물을 일시에 쏟아부어 불길을 잡고 적병을 제압하는 방화 설비입니다. 단순한 방패막이를 넘어 방어용 수리학까지 접목된 복합 요새였습니다.


수원화성을 답사할 때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건축적 전환점은 바로 자재의 하이브리드 결합입니다. 이전의 조선 성곽은 거의 100% 화강암 자연석으로만 축조되었습니다. 단단하지만 무겁고 가공이 까다로우며, 대포 공격을 받으면 돌이 깨지면서 파편 비산으로 인한 2차 피해가 컸습니다.


실학자들은 흙을 구워 만든 검은색 '전돌(벽돌)'의 탄성과 완충 작용에 주목했습니다. 화강암으로 기초와 지대석을 튼튼하게 다진 뒤, 포격의 충격을 직접 받아내야 하는 포루와 치성 상부, 공심돈 등에는 규격화된 전돌을 촘촘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벽돌 구조는 대포알이 부딪혔을 때 깨져 나가는 대신 충격을 부드럽게 흡수하며, 가공이 자유로워 총안(총구멍)과 화포 구멍을 곡선 형태로 정교하게 뚫어내는 데 매우 유리했습니다.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으실 때 다음 세 가지를 직접 눈으로 짚어가며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 총안의 각도 확인하기: 성벽 윗부분에 뚫린 구멍(총안)을 들여다보세요. 멀리 있는 적을 쏘기 위해 수평으로 뚫린 원총안과, 성벽 바로 밑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가파르게 아래로 비스듬히 깎아낸 근총안의 각도 차이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 서북공심돈의 내부 상상하기: 화서문 옆에 우뚝 솟은 서북공심돈을 바라보세요. 속이 텅 빈 3층 전돌 망루로, 층마다 화포와 총구를 사방으로 배치하여 최소 인원으로 360도 전 방향을 타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조선 축성술의 정점입니다.


  • 옹성 바깥 출입문의 비대칭 구조: 옹성 한가운데가 아니라 한쪽 측면으로 출입구를 치우치게 만들어, 적이 한눈에 성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 시선 차단 설계를 확인해 보세요.


수원화성은 단순히 군주 한 사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기념비가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던 인부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 거중기를 고안했던 실학의 온기와, 과학적 역학으로 백성과 병사의 안전을 지키려 했던 조선 후기 지성사의 가장 눈부신 성취였습니다.


[핵심 요약]

  • 치성은 일직선 성벽의 밑동 사각지대를 없애고 좌우에서 적의 측면을 교차 타격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돌출시킨 입체 방어 시설입니다.

  • 성문을 감싸 안은 반달형 옹성은 적의 직진 공격을 차단하고 갇힌 공간에서 섬멸하며, 오성지를 통해 화공을 즉각 방어하는 복합 요새 설계를 갖췄습니다.

  • 화강암 기초 위에 규격화된 흑색 전돌을 결합하여 포격의 충격을 흡수하고 다양한 화포 총안을 정교하게 가공한 실학 건축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다음 편 예고]

대망의 마지막 15편에서는 본 전통 건축 시리즈를 갈무리하며 ‘사라져가는 고택을 지키는 사람들: 한옥 유지관리의 현실적 난제와 보존 과제’를 다룹니다. 목조건축의 특성상 겪게 되는 흰개미 피해, 비틀림과 누수, 현대식 주거 편의성과의 충돌을 짚어보고 미래 세대로 이어갈 현실적 보존 방안을 모색합니다.


[독자 소통]

수원화성 성곽길이나 장안문 옹성을 직접 걸어보셨을 때, 다른 옛 산성들에 비해 유독 견고하거나 정교하다고 느껴졌던 공간이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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